가면 놀이 연작.- 어린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연구
-신화를 차용해 현실을 환상적 리얼리즘으로 냉소하다.
가면놀이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 중에는 판타지적 세계나 동화 속 세상을 떠올리게 하는 시선도 있을 것이다. 동물 가면을 쓴 아이들과 이질적인 구성 요소의 결합은 분명 판타지적 요소를 연상시킬 것이다. 하지만 낯설게 조합된 일상의 풍경들은 여러 대비를 통해 불안의 정서를 만들어 내며, 현대 사회에 대한 냉소와 비판적인 시선을 드러낸다.
정신과 물질이라는 이원화된 서구적 시각은 근대 이후, 현대인들이 세계를 인식하는 보편적 기준으로 자리잡고 있다. 인간을 자연의 거대한 순환의 일부에서 떼어 내어 독립된 개체라는 모순된 인식으로 인간 중심적이고 개별화된 욕망이 만든 현실 속에서 사회의 여러 문제를 넘어 모든 생명들의 생존에 대한 지속 가능 여부까지 물음을 던지게 하고 있는 것이 현대 사회의 현실이다. 가면놀이는 이러한 서구의 세계를 인식하는 이원화된 세계관을 ‘누미노제적(루돌프 오토) 관점’으로 바라보며, 신화를 차용하여 우리의 현실을 그려내는 환상적 리얼리즘 연작이라 할 수 있다.
종말론적 세계와 그 이후를 그리는 노아의 방주 신화는, 기후 재앙과 같은 위기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이기적 욕망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와 겹친다. '어린이가 세계를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연구'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럼에도 대책 없이 여전히 세계를 살아가야 되는 어린이로 대변되는 다음 세대와 뭇 생명들의 처해 있음은 연작의 중심 소재가 된다. 노아가 종말을 대비해 방주를 만든 것처럼, 종말을 마주할지도 모르는 어린이들과 다양한 생명들은 어떻게 자신과 세계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을까? 어쩌면 대홍수를 대비하며 남은 생명을 보존하고 새로운 시대를 시작한다는 노아의 방주 신화 속 이야기는 욕망이 만들어 내는 파국이 어떠한 모습일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현대 문명의 행보보다 더 희망을 이야기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거대하게 몰려오는 쓰나미의 기세 앞에 여린 손과 맨 발로 종말을 대비하는 가면을 쓴 어린이들의 모습을 통해 판타지적 이미지 이면에 비치고 있는 지금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았으면 한다.
Pietà
피에타
서구의 피에타(Pietà)라는 도상은 오랜 시간 동안 죄와 구원, 그리고 숭고와 모성의 상징으로 존재해 왔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된 아들과, 그 아들을 품에 안고 슬픔에 잠긴 어머니의 모습은 서구 종교미술을 대표하는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성스러운 도상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서구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피에타라는 도상을 인간 중심의 의미 안에 머물게 했는지도 모른다.
가면놀이(Masquerade)의 피에타는 물질과 정신, 인간과 자연, 생명과 죽음을 분리해 바라보는 이원론적 시선을 넘어,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 순환의 고리 안에서 바라보려는 시도로 읽을 수도 있다.
가면을 쓴 아이들은 물고기를 품에 안고 있다. 아이들의 표정과 몸짓은 기존의 피에타 도상처럼 슬픔과 비통함, 애도의 감정으로 가득하지만, 그 장면은 종교적 구원의 약속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아이들이 끌어안고 있는 존재들은 상실의 흔적이며, 동시에 현대 세계가 잃어버린 경물(敬物)의 정신과 생명의 잔해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피에타라는 종교적 도상을 바라보며 오랜 시간 이미 정해진 감정을 학습해 온 것은 아닐까.
가면놀이의 피에타는 바로 그 익숙한 숭고의 언어를 의심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아이가 끌어안고 있는 죽은 물고기는 신성한 희생도, 인간을 위한 대속도 아니다. 그것은 숭고가 사라진 시대의 아픔이며, 의미조차 부여받지 못한 채 남겨진 상실의 감정이다.
피에타라는 도상에는 이미 오랜 시간 축적된 상징과 기억이 존재한다. 그리고 가면놀이 속 피에타는 그 오래된 도상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충돌한다. 익숙한 종교적 상징과 가면을 쓴 낯선 아이들, 숭고와 공허가 서로 부딪히는 지점이 만들어진다.
그 충돌은 작품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의 기억과 신념, 감정과 시대적 감각 또한 그 이미지와 만나 또 다른 긴장을 만들어 낸다. 그 충돌의 순간들이 하나의 고정된 해석으로 수렴되기보다, 새로운 감각과 사유, 그리고 창조를 생성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Prometheus
프로메테우스
나의 어린 시절 놀이에는 두 개의 세계가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는 무언가를 만들고 변화시키는 창조의 세계였고, 다른 하나는 신비의 세계였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집을 짓고, 배를 만들고, 여러 사물들을 조합하며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놀이를 반복했다. 그리고 놀이가 깊어질수록 언제나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하나의 의식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불의 초대였다.
불은 우리에게 온기를 전해 주었고, 음식에 열을 가해 전혀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 우리를 사로잡았던 것은 단지 그 유용함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어쩌면 불이라는 신비 그 자체에 매혹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단단하고 영원할 것만 같던 세계의 사물들은 불 앞에서 순식간에 소멸하며 모습을 감추었다. 동시에 불은 살아 있는 생명처럼 일렁이며 타올랐고, 우리가 먹이를 줄수록 더욱 거대하고 두려운 존재로 변해 갔다. 그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품은 존재는 현실 너머 또 다른 세계를 암시하는 듯했다.
어린 시절 우리를 사로잡았던 것이 단지 어린아이의 환상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도 나에게 불은 여전히 신비의 세계를 품은 존재로 남아 있다. 어쩌면 그렇기에 불은 오래전부터 수많은 신화와 종교 속에서 특별한 상징으로 자리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존재다. 인간은 그 불을 통해 문명의 진보를 이루었고, 오늘날의 기술과 과학 또한 그 불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불은 동시에 세계를 소진시키고 파괴하는 힘 또한 품고 있다. 문명을 가능하게 한 불은, 동시에 소멸의 불이기도 했다.
종교 속에서도 불은 신비로운 상징으로 반복되어 등장한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불타는 떨기나무를 통해 신의 현존을 마주했고, 조로아스터교에서 불은 진리와 빛의 상징이 되었으며,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涅槃)은 욕망과 집착의 불길이 꺼진 상태를 의미한다.
이처럼 불은 문명과 진보, 진리와 구원, 욕망과 파괴를 동시에 품은 양가적인 상징으로 존재해 왔다.
Masquerade: Prometheus 시리즈 속 아이들은 불을 들고 있다.
불을 건네받은 어른들의 세계가 오늘의 시대 앞에 서 있듯, 아이들 또한 다시 한번 그 불을 건네받는다. 그리고 손에 불을 쥔 채, 그들은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시간 앞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Numinose
누미노제
고향인 제천, 단양 주변에는 국립공원들을 비롯한 오르기 좋은 산들이 있어 지금도 종종 시간을 내어 산을 오르곤 합니다. 소백산은 높은 산이지만 정상에는 마치 소의 등처럼 완만한 구릉이 펼쳐져 있어 경상도 자락에서 넘어오는 거대한 구름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세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이에서, 일상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한 구름들이 빠르게 정상을 향해 밀려오는 장면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 광활한 마주함 속에서는 익숙한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게 되며, 경이로운 세계와 대면하게 됩니다. 매혹과 두려움을 내포하고 다가온 현실의 이면은 초월적 세계의 이면이기도 합니다.
낭만주의 시대의 화가들 역시 그러한 시선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윌리엄 터너(J.M.W. Turner)나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풍경화 속에는 단순한 자연의 재현을 넘어 현실 이면에 존재하는 숭고함과 초월적 감각이 담겨 있습니다.
근대 이후의 세계는 서구의 이원론적 질서 속에서 인간 중심적으로 세계를 이해해 왔습니다. 모든 것을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믿으며 바라보고 있지만, 우리는 우주 앞에서 세계의 작은 일면만을 바라볼 수 있는 존재일 뿐입니다. 오늘의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은 경이의 세계를 살아가는 어린이의 시선으로부터 실낙원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또는 태양의 장막 너머 광활한 시간의 흔적을 품은 우주와 마주하게 될 때에도, 우리는 일상 속에 묻혀 있던 경이로움과 마주하게 됩니다. 가면놀이(Masquerade) 속 아이들은 종종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아이들의 시선 속에는 인간 중심의 질서로 환원되지 않는 광활한 세계와 생명의 감각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지금 여기의 경이로움을 바라볼 줄 아는 시선을 갖고 오늘의 세계를 응시합니다.
